2023.10.15 (일) 여행 11일째
숙소가 외곽이 있어 마드리드 아토차역에서 그라나다행 아침 7시 기차를 타기 위해서는 숙소에서
새벽 5시 30분에는 출발해야 한다. 아토차역으로 가는 교외선 첫차가 일요일에는 6시부터 운행하므로
택시를 타고 가려고 지갑을 찾으니 없다. 어제 마드리드 왕궁을가기 위해 지하철을 이용했는데 그때 지갑을
도둑맞은 것 같다. 지하철에서 나와 백팩에서 선글라스를 꺼내려고 하니 가방이 조금 열려 있었지만 그때는
별 의심을 하지 않았었다.
오늘 아침에야 지갑이 없어진 것을 보고 소매치기 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갑자기 눈앞이 깜깜해진다. 택시 탈 돈이 없다. 체크카드 한 장이 남아 있지만 택시 결재가 된다는 보장이 없다.
어쩔 수 없이 주머니에 남아 있는 잔돈으로 기차라도 타기 위해 급한 마음으로 역으로 나갔다.
티켓자동판매기에서 표를 사려고하지만, 몇 번을 시도해도 자꾸 에러가 난다. 새벽시간에는 근무자도 없었다.
6시 기차를 타고 아토차역으로 가도 7시 그라나다행 기차를 타는 것이 빠듯한데 마음은 더욱 급해진다.
자동판매기 몇 대를 거치다 보니 한 곳에서 겨우 티켓을 살 수 있었다. 머릿속이 하얗게 된다.
기차 도착 때까지 분실한 카드사 사이트에 접속해서 해외결재 차단 신청과 분실신고를 했다.
하나카드는 쉽게 분실신고가 되는데, 우리카드사는 할 수가 없다. 분실한 카드번호와 CVC 번호를 입력해야 하고,
휴대폰으로 받은 인증번호를 입력하라고 한다. 젠장... 지금은 해외 유심 쓰고 있고 지갑을 통째로 잃어버렸는데
어떻게 할 수가 없다.
아토차역에 도착하니 6시 45분. 그라나다행 기차 타는 플랫폼은 떨어져 있고 보안검색대도 거쳐야 한다.
15분 내 그라나다행 renfe 기차를 타야 하니 마음은 더욱 조급해진다. 보안검색대에 길게 줄을 선 사람들이 보여 물어보니
여기는 다른 회사 기차라고 한다. 아토차역에는 메트로, 교외철도, 장거리용 기차인 renfe, AVE, iryo, OUiGO 등이 있어 현지인이 아니면 초행자는 무척 헷갈리게 되어있다.
다행히 경비원이 보여 물어보니 아래층으로 가라고 한다. 시간은 왜 그리도 빨리 가는지. 기차 출발 몇 분 전이다.
허겁지겁 서둘러 겨우 출발직전 기차를 탔다. 한 달간 여행 전체에 대한 교통편, 숙소 등을 모두 예약하고 왔기에 하나만
잘못되어도 낭패이다.
여행 전 그렇게 소매치기 등을 조심해야 한다고 머릿속에 각인시켜서 왔는데도, 여행 9일 동안 별 문제가 없다 보니
방심을 하였고, 결국 10일째 소매치기당한 것이다.
현금을 조금만 가지고 와서 카드를 사용하면 될 것을 미련하게 작년 여행 때 사용하고 남은 현금을 많이 가져와서 피해가
컸다. 불행 중 다행으로 여권 및 카드 한 장은 남아 있다. 소매치기당한 것이 어이가 없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그라나다역에 내리자마자 곧바로 ATM에서 400유로를 인출했다. 어제는 카드 결제가 되지 않아 내심 불안했는데
다행이다. 이제부터 귀국 때까지 여권과 남은 카드 한 장을 신줏단지 모시듯이 잘 간직해야 한다.
나이 들어 갈수록 자꾸 바보 같아진다.
호텔에 도착하니 11시가 조금 넘는다. 체크인은 오후 2시부터 한다고 해서 가방을 맡겨두고 그라나다 시내로 나간다.
이른 아침부터 지금까지 식사도 못했지만 마음이 불편하니 배가 고픈 줄도 모르겠다. 일단은 마음부터 진정시켜야겠다.
빠예야를 하는 식당이 보여 생맥주 한 잔과 해물 빠예야를 시켰다. 맥주 한 잔을 마시고 나니 조금 마음이 풀어진다.
피 같은 은퇴자의 돈 1,400유로, 미화 200달러, 우리 화폐 20여 만원 등.... 빨리 잊도록 하자.
그라나다는 작은 도시이다. 걸어서 다 둘러볼 수 있기에 발길 닿는 대로 가본다.
호텔에서 10분 거리에 있는 Plaza Isabel La Catolica라는 동상이 보인다. 콜럼버스의 항해를 이사벨여왕이
허락하는 것을 형상화한 동상이라고 한다.
한 때 세계에서 우뚝 선 스페인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콜럼버스와 같은 대탐험가와 미래를 내다볼 줄 아는
선경지명을 지닌 이사벨 여왕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나라의 정치현실과 저출산율 등을 보면 앞이 안 보인다.
동상에서 5분 거리의 골목에 있는 Corral del Carbon이라는 곳이다. 14세기의 건축물로 마당 가운데 우물이 있는
사각형태로 여관과 창고였다. 건물 기둥마다 포도나무가 심어져 있어 포도가 주렁주렁 열렸을 때는 보기가 좋겠다.
그라나다에서는 줄지어 이동하는 사람들을 따라가면 그곳이 볼거리이다.
인근 그라나다 시청으로 가본다. 인포메이션 센터를 운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은 일요일이라 문을 닫았다.
작은 건물이라 철창 사이로 휴대폰을 넣어 내부 사진을 찍었다.
또다시 많은 사람들이 이동하는 대로 함께 따라 걷는다. 얼마 안 가서 분수가 보인다. 구글맵을 보니 유서 깊은
바로크풍 돌분수 Fuente de las Batallas이다. 지중해성 강렬한 햇빛으로 분수대에 무지개가 생겼다.
이곳 분수에서 조금 더 걸어 내려가면 또 다른 분수 2개가 있는 소공원이 나왔다.
분수에 공급되는 물은 멀리 시에라 네바다 산맥의 만년설에서 끌어 온 것이 아닐까 추측해 본다.
왜냐면 알함브라궁 헤네랄리페 정원의 물도 그곳에서 끌어와서 공급하니까. 어쩌면 그라나다 식수원 전체가
시에라 네바다 산맥의 만년설일 수도 있겠다.
소공원 옆으로 하천이 흐르고 있다. 하천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건너는 사람은 없었다.
되돌아 중심가로 들어가니 그라나다 대성당이 있다. 딱히 5유로 내고 들어갈 생각이 없다. 대신 성당 옆에
'마드라사 현대 문화의 중심지 그라나다 대학교'라는 간판이 있다. 내부에는 만화풍의 그림이 전시되어 있다.
알함브라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니콜라스 전망대로 가려면 누에바 광장을 지나야 한다.
광장 골목 안에 한국식당이 보인다. 메뉴판을 보니 한 끼 식사에 2 만원 수준이다.
경사진 주택가 좁은 골목길을 지그재그로 위로만 향해서 올라가면 전망대가 있다.
니콜라스 전망대에서 보는 알함브라의 야경이 좋다고 하나, 해질 때까지 4시간을 기다릴 수 없어 발길 닿는 대로
빙돌아 숙소로 돌아가기로 한다. 오늘은 기분도 그렇고 아침부터 설쳐서 숙면이 필요하다. 시원한 맥주 한 잔 마시고
쉬어야겠다.
그라나다는 1492년 기독교 세력에게 점령되기까지 전까지는 800여 년간 이슬람이 지배한 도시이자 이슬람 왕국의
마지막 거점도시로써 이베리아 반도에서 가장 번성한 도시였다.
이슬람 나스르 왕조의 마지막 왕 보아드딜은 이사벨 여왕에게 궁을 파괴하지 말아 달라는 조건으로 스스로 궁전을
내놓았다고 한다. 그는 “스페인을 잃는 것은 아깝지 않지만 알함브라를 다시 볼 수 없는 것이 원통하구나”라고 하며
통한의 심정으로 시에라 네바다 산맥을 넘어갔다고 한다.
얼마나 아름답고 애착이 갔기에 그랬을까? 이러한 알함브라를 관람하고 다시 기운을 내어 마지막까지 안전하게
여행을 마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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